[ 우리나라 주소 체계의 발전 ]

대한제국 시대에 행정구역의 세부 경계를 확정하고, 토지에 필지 개념으로 번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주소체계로 전환하는 과도기였다

㉒ 근대적인 주소 체계의 발전 – 대한제국

1897년 위태로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수립된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조세 제도를 확립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했다. 제대로 된 조세를 위해서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이 바탕이었으나 당시 100년 가까이 토지조사인 ‘양전(量田)’을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를 보통 ‘광무양전사업’이라고 부른다. 이 사업에서는 기존의 ‘양전’과 미국 등으로부터 받아들인 선진 측량기술을 결합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래 사진은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물 중 <괴산군양안(槐山郡量案)>의 일부다.

<그림1> <괴산군양안(槐山郡量案)> (출처: 한민족대백과사전)

광무4년, 즉 1900년에 작성된 이 양안에서 당시의 주소 표기 방식을 볼 수 있다.

먼저, 오른쪽 두번째 줄 ‘면계(面界)’는 면의 경계를 표시한 부분으로, 동서남북에 접한 다른 면의 명칭을 이용해서 표기했다.
다음 줄, ‘자갑자지현자 오십사자(自甲字至顯字 伍拾肆字)’는 ‘갑’자부터 ‘현’자까지 천자문에서 54개의 글자를 지번으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도 조선시대에 일반적인 주소 표기 방식인 ‘사표방식’과 ‘천자문 자호방식’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기존의 양전 형식으로 정리했기 때문에 성과물인 지도에는 새로운 기술이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한반도를 점령하는 상황이 되면서 양전 사업이 중단되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측량기사 양성의 시급함을 깨닫고 교육과정을 개설하여 기술자 양성에 나섰다. 한반도를 강점하려는 일본의 입장에서도 토지 조사와 징수 체계의 근대화가 필요했기에 기술자 양성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다른 한편, 정부는 민간에 임대한 국가 소유 토지를 조사하여 재정을 충원하려 했지만, 모든 토지를 조사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정부는 특정 토지를 제외한 제실재산(帝室財産: 황실 소유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하고, 1908년 ‘임시재산정리국’을 설치하여, (국유)재산의 조사 및 정리와 토지 측량 등의 사업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한성부와 주변 경기도, 평양, 개성 등지에서 근대 기술을 이용한 측량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지도가 제작되었다.[1]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이, 조선 시대에는 전국을 수도인 한성부와 지방 팔도로 나누고, 수도 한성부에는 부(部) → 방(坊) → 계(契), 도에는 현(縣)/군郡 → 면(面) → 리(里)로 내려가는 주소 체계를 사용했다.

1894년 갑오개혁 시기에 수립된 개화파 정권은 조선을 근대적인 체제로 변환시키려 했다.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 8도를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으나 개화파 정권이 몰락하면서 2년만에 13도 체제로 돌아왔다.

한성부는 5부(部) 체계의 부(部)를 서(署)로 명칭을 바꿔서, 중부, 서부, 남부, 동부, 북부가 중서(中署), 서서(西署), 남서(南署), 동서(東署), 북서(北署)가 되었다. 부(部) 아래의 방-계 체제는 그대로 유지했고, 계와 동(洞)을 많이 신설해서 해서 5서 47방 228계 775동이 되었다.

이러한 5서 체계는 부분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경술국치 이후인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림2> <필운동 일대 지적도>, 「경기도한성부지적도」, 1908,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위의 지도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에 제작된 「경기도한성부지적도」 [2] 중 필운동 지역의 지도다. 이 지도는 방(坊) 단위로 총 235매를 제작하여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3] 대동여지도처럼 각각의 지도를 접어 책자처럼 보관할 수 있으며 각각 표지도 달려 있다. 위에 인용한 지도에는 옆 공백(오른쪽 상자로 표시)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인쇄되어 있다.

      京畿道 漢城府 西署 仁達坊圖 八枚之內 第五號

      경기도 한성부 서서 인달방도 팔매지내 제오호

한성부 서서 인달방은 현재의 종로구 서촌 지역이다. 이 지도에는 남정현(南征峴), 필운동(弼雲洞), 전정동(塡井洞), 구동(龜洞), 송목동(松木洞), 사직동(社稷洞), 전립동(戰笠洞), 도가동(都家洞), 청평위궁동(淸平尉宮洞) 등이 표시되어 있다. 거북골(구동)이나 소나무골(송목동)에서 유래한 이름, 물건을 제조 판매하는 도가집들이 있는 동네(도가동), 우물이 있었던 동네(전정동)에서 유래한 이름 등 자연부락에서 유래한 이름을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가져온 것인데, 이렇게 행정구역을 마을 단위, 즉 동 단위로 세분화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지도에 행정구역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위의 도면에는 방(坊) 경계와 동(洞) 경계가 함께 표시되어 있으며 방의 경계는 이중쇄선(-‧‧-‧‧)으로, 동의 경계는 파선(- – -)으로 표시되어 있다. 서(署) 경계와 동(洞) 경계가 함께 나오는 도면에는 서의 경계를 이중쇄선(-‧‧-‧‧)으로 표시했다. 예전처럼 도로나 개천 등으로만 행정구역을 나눈 것이 아니라 밀집한 가옥 사이로 선을 그어 행정구역을 나누기도 했다.

또한, 지도에 원으로 표시한 곳의 주소는 ‘塡井洞 一0 垈’라고 되어 있다. ‘전정동 10 대지’라는 뜻인데, 하나의 필지에 하나의 번호를 부여하고 대지(垈) 혹은 밭(田)을 표기해서 지번과 지목을 기재해 놓은 것이다.

이처럼 행정구역의 세부 경계를 확정하고, 토지에 필지 개념으로 번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시대는 근대적인 주소체계로 전환하는 과도기였다.

2년 뒤인 1910년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토지조사는 중단되었다. 주소체계도 일본식으로 완전히 바뀌어 이 시기의 주소는 몇몇 행정구역의 명칭에서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시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물리적으로 구획한 토지인 필지에 고유번호인 지번을 부여하면서 ‘지명+숫자’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지명’은 행정구역 체계에 의해서 정해지며, 상위 행정구역에서 하위 행정구역으로 분할, 좁혀가는 방식이다. ‘숫자’는 하나의 필지에 고유하게 부여되는 번호인 지번이다.

그러면, 앞의 지도에서 보았던 땅의 주소는 일제 강점기 때 어떻게 되었을까?

<그림3> 필운동 일대 지적도, 1912, 국가기록원 소장

위의 지도는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작성한 지적원도다.[4] 이 지도에서 원으로 표시한 곳이 앞의 지도와 동일한 토지인데, 주소를 보면, ‘弼雲洞 一九二 垈(필운동 192 대지) 108’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적도에서도 하나의 필지에 하나의 지번을 부여하고 지목을 병기해 놓았다. (함께 써 있는 아라비아 숫자(108)는 측량을 위해 부여하는 측량번호다.)

필운동에 동쪽으로 접해 있던 많은 동들은 필운동의 일부로 흡수되거나 내자동으로 통합되면서 없어졌고, 북서순화방(北署順化坊)은 북부순화방이 되었다. (이때 한성부가 경기도 관할 경성부로 격하되어 경성부 북부순화방이 되었다.)
동(洞)은 1936년 경성부의 동명과 관할구역 개편 때 정(町: 마치)으로 바뀌어 필운동, 체부동이 필운정(필운마치), 체부정(체부마치)가 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옛 이름을 찾았다.

위 지도의 주소는 현재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길(필운동)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금천교시장, 적선시장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그림4>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입구(카카오맵). 오른쪽 골목 입구에 주소에 해당하는 가옥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지방행정구역은 몇 번의 개편을 거쳤다가 1930년 이후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도(道), 부(府), 군(郡), 읍(邑), 면(面) 체계를 갖췄다. 도(道)는 대한제국 때의 13도 체제가 유지되어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부(府) 제도는 군(郡)과 같은 층위의 행정구역으로 일본총독부가 효율적인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농촌과 도시를 구분지어 관리하기 위해 도입했다.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 시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부(府)의 하위 행정구역으로는 동(洞)/정(町)을 두었다.

수도인 경성부는 규모가 컸기 때문에 경성부 하위에 한성부의 5부(部) 대신에 ‘출장소’를 설치했다. ‘경성부 → 출장소 → 동/정’으로 내려가는 체계였다. 1943년에 출장소를 구제(區制)로 변경해서 종로구·중구·동대문구·용산구·성동구·영등포구·서대문구·마포구의 8구로 했는데, 이러한 구-동 체계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반도미야, 「대한제국기의 토지조사와 지도제작에 관한 고찰 -한성부 대축척 실측도를 중심으로-」, 『지리학논총』 제52호(2008.9), 54-63쪽.
[2]  「한성부 서서 인달방도 팔매지내 제5호」, 『1908 한성부지적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3] 반도미야, 앞의 글, 70쪽.
[4] 「경기도 경성부 서부 서대문정2정목외2정-004」, 1912,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국가기록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