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주소 체계의 발전 ]
⑳ 조선 시대는 주소를 어떻게 표기했을까?
부(府), 목(牧), 군(郡), 현(縣)은 모두 도(道)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중요도나 크기에 따라 설치되었다. 예컨대, 부(府)는 대도시나 요충지에, 목(牧)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중심지에 설치되었으며, 군(郡)은 부, 목보다는 작고 현보다는 큰 행정구역이었고, 현(縣)은 가장 작은 크기의 행정구역이었다.
부·목·군·현에는 모두 면(面) → 리(里)로 내려가는 하위 행정구역을 두었다.
수도인 한성부는 ‘부(部) → 방(坊) → 계(契)’ 체계였다. 한성부를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5개의 부(部)로 나누고, 각 부에 10-12개의 방(坊)을 두었다.
<그림1> 「도성도(都城圖)」
위의 지도는 1750년대 제작한 「도성도(都城圖)」[1]로, 5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빨간색 원으로 표시한 부분). 현재 서촌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사실 북부였으며(현재의 서촌과 북촌), 서부는 사직단 부근과 덕수궁 지역 일대에 해당한다.
방(坊)은 수도의 대표적인 도시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동(洞)’과 비숫하다. 한성부는 성안(도성)과 성 밖 구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 성으로부터 10리 정도까지의 구역)를 포함했는데, 방은 이 지역 모두에 설치되었다. 각 방에는 상부상조 기능을 하는 자치조직인 계(契)가 있어서 말단 행정단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림2>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중 사직단 일대
위의 지도는 18세기 제작된 「도성대지도」[2]의 북부(현재의 서촌 부근) 지역이다. 지도의 왼쪽 약간 하단에는 수성궁내계(壽城宮內契)가 인달방(仁達坊)에 속해 있음을 뜻하는 ‘인(仁)’자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계(契) 자 오른쪽에 ‘전립동(氈笠洞)’이 거꾸로 적혀 있다.
자연촌락에서 비롯된 생활 공간 단위인 동(洞)은 대략적인 구분은 있지만 경계는 명확하지 않은 행정구역 단위였다. 계(契)는 방에 속한 주민자치조직으로 행정, 부역 동원 등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18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행정구역 단위로 활용되었다.
여기에 행정관리를 위한 수단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했다. ‘오가작통법’은 중국 진나라의 ‘십오제(什伍制)’, 송나라의 ‘보갑제(保甲制)’에서 영향을 받은 주민 통제 및 조직 수단으로 조선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공식 법제화했다. 다섯 가구(5호)를 한 통으로 묶고, 각 통에 책임자(통주統主 혹은 통수統首)를 두어 치안, 부역 동원 등에 이용했다. ‘오가작통법’은 행정관리를 위해 각 가구에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하도록 해서 이 번호를 주소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주소에 계(契)나 동(洞)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방(坊) 하위에 계나 동을 혼용해서 사용하거나 병기하거나 했다. 또한, ‘동대문 밖’ ‘개천 앞’ 등과 같이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표기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토지 매매 문서와 같은 공식 문서에서도 주소로 사용했다.
<그림3> 1834년에 작성한 이안진의 준호구
위는 조선 시대 준호구(準戶口)의 사진이다.[3] 조선 시대에도 호구 조사를 3년마다 실시했고, 조사 대상인 개인이 정해진 양식에 따라 작성해서 제출했다. 이 종이를 호구단자라고 하고, 호구단자를 모아 정리해서 문서화 한 것이 호적대장이다. 호적대장은 관청에서 보관했다. 토지 매매나 노비 매매 등을 위해 신원을 입증해야 할 때, 관에 요청하면 호적 대장에 기초해서 발급해 주는 서류가 준호구다.
이 준호구를 통해서 조선 시대에 주소를 어떻게 표기했는지 보자.
오른쪽 첫번째 열을 보면, ‘道光十四年月日漢城府(도광십사년월일한성부)’라고 되어 있다. ‘道光’은 청나라 선종 도광제(道光帝)의 연호로 도광14년은 헌종 즉위년인 1834년이다. 월과 일은 써 있지 않다. 마지막의 한성부는 한성부에서 작성한 준호구라는 뜻이다.
다음 열에 주소와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오른쪽에 부분을 확대한 사진)
考 甲午 成籍 戶口帳 內 西部 仁達坊 分繕工內契 第二十一統 第四號 住
고 갑오 성적 호구장 내 서부 인달방 분선공내계 제이십일통 제사호 주
閑良 李安鎭 年三十六 己未生 本 慶州
한량 이안진 년삼십육 을미생 본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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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부분의 考甲午成籍戶口帳(고갑오성적호구장)은 이 문서의 성격을 알려준다. 갑오년(1834년)에 호구를 조사해서 작성한 호구장이라는 뜻이다.
그 다음의 ‘西部 仁達坊 分繕工內契 第二十一統 第四號’가 실제 주소로 ‘한성부 서부 인달방 분선공내계 제21통 제4호’다. 분선공내계는 현재 서울 종로구의 누상동, 누하동 지역이다. 행정구역 다음에 오가작통법에 의한 통-호를 주소로 사용했다.
다음에는 성명으로, 한량 이안진(閑良 李安鎭)이며, 나이는 36세, 을미년생, 본적은 경주라고 적혀 있다. 한량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무관(武官)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수도(도시)가 아닌 지방의 주소는 어떠했을까?
<그림4> 1861년에 작성한 정심준의 준호구
위 사진[4]에서 오른쪽 첫번째 열을 보면, ‘咸豐十一年月日懐仁縣(함풍십일년월일회인현)’이라고 되어 있다. 함풍은 청나라 문종 함풍제의 연호로 함풍11년이면 1861년(철종 12년)이며, 회인현감이 작성한 문서다. 회인현은 조선시대 충청도에 속했던 지방행정구역으로 현재는 보은군으로 통합된 지역이다.
다음 열의 주소와 성명을 보자(확대한 사진의 빨간색 상자 부분).
東靣 梧洞里 第二統 第五戶 幼學 鄭心浚 年三十八 甲申生 本 迎日
동면 오동리 제이통 제오호 유학 정심준 년삼십팔 갑신생 본 영일
동면 오동리 제2통 제5호에 거주하는 정심준이며, 유학(幼學)은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양반이라는 뜻이다. 38세 갑신년 생이며, 본적이 영일(迎日)이라고 적혀 있다. 정리하자면, 주소가 ‘충청도 회인현 동면 오동리 2통 5호’로, ‘도-현-면-리’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통 5호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행정적인 관리를 위해 오가작통에 따라 임의로 부여하는 번호다.
(다음 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