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문화권 국가의 주소들 ]

에도 막부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주거 지역도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신분제에 기반한 도시 구획은 계급에 기반한 도시 공간의 분리로 이어져서 계급 구조가 도시 공간을 구획하게 된다

⑮ 지방자치제가 발달한 국가 – 일본 (1)

일본에서 호적제도가 시행된 것은 아스카 시대인 7세기 후반으로, 690년부터 6년마다 호적을 작성하는 제도가 확립됐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주거지를 기록하도록 했으나 마을 단위였고, 번지에 기초한 주소 제도는 없었다.

고대 국가로부터 중세 막부시대로 전환한 이후, 중앙집권적인 호적 제도는 약화되었고 모든 행정 관리는 각 번(藩) 단위로 이루어졌다. 각 번은 세금, 인구 조사 등 행정 관리를 마을 단위로 수행했고 역시 숫자로 세분화된 주소는 없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호적 제도나 인구 조사를 시행하는 주요한 목적은 징병과 조세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전국 시대 이후 에도 막부 시대에 병농분리(兵農分離) 정책을 실시하여 무사 계급과 농민 계급을 분리했다. 그에 따라 일반 백성을 징집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징병 목적의 인구 조사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에도 막부는 조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적인 토지 조사와 일정 주기(보통 6년)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인구 조사는 가장의 이름 아래 모든 가족 구성원의 이름, 나이, 성별, 신분, 가구주와의 관계 등을 상세히 기록하는 호구 조사로, 마을의 자치시스템에 의해서 이루어진 마을 단위 조사였다. 가구의 가장이 자기 가구의 정보를 촌장에게 알려주면 촌장이 이를 취합해서 호구 조사 장부인 ‘슈몬닌베츠아라타메초(宗門人別改帳)’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영주에게 제출했다.

토지 조사는 전국 시대까지는 국지적으로 이루어졌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최초로 전국적인 토지조사인 ‘태합검지’(太閤検地)를 실시했다. 그뒤 에도 막부 시대에 여러 차례 전국적인 토지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림1> 타카기 마을(高木村) 엔포 검지장

위의 사진은 1679년에 실시한 토지 조사를 기록한 ‘켄치초(検地帳, 검지장)’다[1]. 켄치초에는 필지의 크기, 소유자, 생산량, 경작자 등을 표기했고, 토지 경계를 그림으로 그려 부속 문서로 포함시키기도 했으나 토지의 위치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주소는 없었다.

이 시대까지 우편물이나 공식 문서에서 농촌은 무라(村: 마을)나 리(里: 마을), 도시는 마치(町: 정)라고 단순하게 표기했다.

<그림2> <검지지도(檢地之圖)>. 에도 막부 시대 토지 조사 모습(출처: 小学館 日本大百科全書)

에도 시대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에 따라 계급을 구분하는 사회였는데, 일본에서의 사(士)는 선비가 아니라 무사를 뜻한다. 신분에 따라 주거지역도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그림3> 1840년대 에도 지도 (<에도 오에즈(江戸大絵図)>)

위의 지도는 에도 시대 후기인 1840년대 에도의 지도다.[2] 지도 중앙은 에도 성이 있는 곳으로 가장 높은 지역이다. 그 주변에는 상대적으로 넓게 구획된 토지들이 있는데, ‘야마노테((山の手)’ 지역으로 쇼군 직속의 무사들과 각 지방에서 올라온 번주, 영주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그 바깥쪽으로는 좁게 구획된 칸들이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는데, 이곳은 ‘시타마치(下町)’라고 불렸으며, 상인과 장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지대가 낮았다. 누구든 자기 신분을 벗어나는 곳에 거주할 수 없었고, 또 상공인들은 같은 직종끼리 같은 구역에 거주지를 형성했다.

에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도시에는 영주가 거주하는 성이 가장 높은 곳에 있고 성 주변에 조카마치'(城下町)’가 있었는데, 성을 둘러싼 구역에는 무사들의 거주 구역인 ‘부케치(武家地)’가, 그 바깥쪽에는 상인들과 장인들의 거주 구역인 ‘조닌치(町人地)’가 있었다.

이렇게 신분제에 기반한 도시 구획은 현대에 와서는 계급에 기반한 도시 공간의 분리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도쿄의 야마노테 지역에는 상류 계급이 거주하고, 시타마치 지역에는 가난한 동네가 많아서 계급구조가 도시 공간을 구획하고 있다는 것이다.[3]

메이지 시대인 1873년 일본 정부는 근대적인 토지 및 조세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지조개정(地租改正)>을 시행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고, 각 필지에 고유한 번호인 치반(地番, 지번)을 부여하면서 근대적인 주소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지번 주소는 토지 소유권, 등기, 세금 등 행정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이 늘어나고 행정 구역의 경계가 변하면서 기존의 주소가 실제 생활과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 주소를 합리적으로 효시하기 위해 1962년 ‘주거 표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주거표시(住居表示) 주소’ 체계를 도입했다[4]. 우리나라의 법정동, 행정동과 같은 주소 체계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우편, 배달, 방문 등 일상생활에서는 주거표시주소가 사용되며,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 주거표시주소 제도가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적인 결정에 따라 시행하게 되어 있어서 우리의 시각에서는 전국적인 표준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게 보인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高木村延宝検地帳』, 京田辺市 소장, 3-4쪽.
[2] <에도 오에즈(江戸大絵図)>, 제작 연도: 1844년 ~ 1848년, 오쿠무라 기헤이(奥村喜兵衛)의 원판을 재발행.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267281. 원 지도의 방위는 서쪽이 위를 향하고 있어서 북쪽이 위를 향하도록 방향을 돌렸다.
[3] 하시모토 겐지, 『계급도시: 격차가 거리를 침식한다』, 김영진, 정예지 번역, 킹콩북, 2019.
[4] “住居表示制度”, 總務省, https://www.soumu.go.jp/main_sosiki/jichi_gyousei/daityo/juukyo_hyouji_seido.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