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

중세에는 왕과 봉건 영주 사이의 토지 소유 관계와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주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리거나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글로 써서 표시했다

⑨ 중세 유럽의 주소

중세 유럽은 중앙집권적인 행정력이 약화된 봉건 사회였기 때문에 고대 로마나 동양에서와 같은 전국적이고 정기적인 토지-인구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11세기 윌리엄 정복왕이 영국의 왕으로 즉위한 후 토지 소유권과 세금 징수를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1086년 정복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조세원을 확보하기 위해 전국에 조사관을 파견해서 주택, 토지, 농민, 농노, 가축, 재산 등을 조사했다.

이 조사는 아래 지도[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잉글랜드 전역을 각 지역으로 나누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런던, 윈체스터 등 몇몇 지역은 제외되었다. 윈체스터는 왕실 소유지였기 때문에 조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런던의 경우, 당시에도 인가가 너무 많고 도시 구조도 복잡해서 효율적인 조사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영토 장악력이 확고하지 못했던 국경 지방들도 같은 이유로 조사에서 제외되었다.

<그림1> <도메스데이 북> 작성 당시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

그럼에도 최초의 대규모 전국적인 조사였고, 그 결과는 『도메스데이 북(Domesday Book)』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아래 사진[2]은 도메스데이 북 중 콘월(Conwall) 카운티에 관한 부분인데, 콘월에 속한 각 마을 단위로 조사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조사가 마을 별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상자로 표시한 부분은 콘월의 ‘블리슬랜드(Blisland)’라는 마을을 조사한 내용이다.

<그림2> 『도메스데이 북』 중 콘월의 블리슬랜드 마을에 관해 기록된 부분

조사 내용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마을의 소유주(정복왕 윌리엄), 세금(양 11마리), 이 마을의 가치(이전 왕의 시대에 100실링), 가축(소 7마리), 쟁기, 노예(7명)와 농민(12명)과 소작농(20명)의 숫자, 목초지와 목장 및 숲의 크기 등등 구체적인 항목과 숫자가 적혀 있다.

정복왕 윌리엄 시대의 조사는 체계적이고 대규모로 이루어진 토지조사와 인구조사였지만, 일회적이었다.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행정력이 뒷받침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에서의 토지-인구 조사는 대개 카톨릭 교구를 중심으로 교인을 기록, 관리하거나 봉건 영주의 장원대장을 통해 인구를 추정하는 정도였다. 부분적인 차원에서 마을 단위로 이루어진 조사였고, 거리 이름이나 주소는 없었다.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에서 그랬던 것처럼 랜드마크나 지형지물을 이용했다.

<그림3> Map of the Manor of Digswell, 1959, Samuel Peirse

위의 사진[3]은 1599년 영국에서 제작된, 가장 오래된 교구 지도 중 하나로, 런던 북쪽 딕스웰(Digswell) 지역의 토지의 구획별 소유권을 지형을 이용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원대장에는 영지 즉 토지에 관해서도 기록했는데, 왕과 봉건 영주 사이의 토지 소유 관계와 경계를 표시하는 것이 중요했다. 주소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리거나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글로 써서 표시했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Thomas Gun,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2] 출처 <Open Domesday>, Anna Powell-Smith, https://opendomesday.org
[3] Map of the Manor of Digswell, 1959, Samuel Peirse, <Our Welwyn Garden City>, Hertfordshire County Council, https://www.ourwelwyngardencity.org.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