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주소 체계의 발전 ]

조선 시대로 떠올리는 한성오부의 행정구역 체계나

수도에 성저십리를 포함시키는 체계는 이미 고려 때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⑲ 고려 시대의 주소 체계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국한 고려는 초기에는 지방 호족 통합을 위해 신라 제도를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 이념과 당나라의 영향으로 독자적인 체계를 완성해 갔다.

고려의 행정 구역 체계는 11세기 초 현종 때에 와서 전국을 5도 양계(五道 兩界)와 경기(京畿)로 나누면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래 지도[1]에서 보는 것처럼, 양계인 북계와 동계는 국경 방어를 위해 설치한 특별 군사 구역이었다.

<그림1> 고려 시대의 5도양계(출처: 국가지도집I)

경기(京畿)는 수도인 개성(개경)을 둘러싸서 수도를 보호하고, 기능을 돕기 위한 지역으로, 중국 주나라 때의 천자 직할지에서 유래한 단어다[2]. 즉, 수도를 둘러싼 지역이라는 의미이며, 마찬가지로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 주변 지역 역시 경기(京畿)였다.

수도 직할지인 경기는 고려 초기에는 지방 행정구역이자 동시에 왕권 중심의 특별 통치제도가 혼합된 성격을 가졌고, 후기로 오면서 지방 행정구역인 도(道)로 격상되었다. 이러한 지방 행정 구역 상의 명칭이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5도와 양계, 그리고 경기를 상위 행정구역이라고 한다면, 하위 행정구역에는 주·부·군·현이 있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1> 고려 시대 행정 구역의 명칭과 내용

고려 시대의 행정구역 체계는 ‘도/경기 → (부) → 군 → 현’으로 내려가는 체계였으며, 현 아래에 자연 촌락인 ‘리(里)’가 있었다.

주소 표기 방식도 마찬가지로 하위 행정단위로 내려가는 체계였고, 하위 행정 구역에 자연 촌락인 마을 이름을 붙이면 주소로서 식별할 수 있는 표지가 되었다.

<그림1>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국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의 사진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호적 문서로[3], 고려 말 이성계가 300호를 식실봉(食實封)으로 받은 마을의 호적을 이방원이 기록, 작성한 것이다.
고려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1천호의 식읍(食邑)과 300호의 식실봉(食實封)을 하사했다. 식읍과 식실봉은 왕이 특별한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던 토지와 가호에 대한 조세수취권이다. 식읍은 포상의 상당함을 보여주는 허명(虛名)이고, 식실봉은 실제 가지게 되는 조세수취권이다. 이성계가 300호나 되는 지역의 조세수취권을 받은 것으로 보아 당대 최고의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호구는 대상자가 직접 두 장을 작성해서 한 장은 관에 제출하고 한 장은 자신이 보관했다. 이 「호적 관련 고문서」에는 이성계의 집뿐만 아니라 40호의 호적이 포함되어 있다. 식실봉으로 받은 촌락이니 촌락에 속하는 호구를 조사하여 그의 아들 이방원이 작성하여 제출한 것 같다. 함경도 화령부에 제출한 호적 문서는 한 벌은 중앙정부가 있는 개경으로 보내졌고, 다른 한 벌은 이성계의 가문에서 보관했다. 이 호적 문서를 통해 고려 시대의 주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림2>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 (부분)

문서가 많이 낡고 훼손되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앞 부분(오른쪽 상자 표시)에 호적 문서를 작성한 일시와 주소가 적혀 있는데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洪武貳拾參年庚午拾參月 日 和寧府 戶口柱帳 施行

     홍무이십삼년경오십이월일  화령부 호구주장 시행

     東面 德興部

     동면 덕흥부

첫번째 줄의 ‘홍무23년 경오’년은 서기 1390년이다. 연월일 뒤의 화령부는 함경도에 속한 부(府)로 화령부가 호구주장(호구대장)을 작성하는 관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줄의 동면 덕흥부(東面 德興部)가 이 촌락의 주소로, 전체 주소는 ‘함경도 화령부 동면 덕흥부’가 된다. 현재의 함경남도 영흥군 덕흥면 일대에 해당한다.
여기서 동면(東面)은 화령부의 동쪽 구역을 뜻하는데, 이때 면(面)은 부(府)와 촌락(村)/마을(部) 사이에 사용하기도 했던 행정 단위다. 덕흥부(德興部)에서 부(部)는 화령부에서의 부(府)와 달리 부락, 촌락을 말한다. 고려 말로 오면, 행정단위로 촌(村) 대신에 리(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 호적 문서에서처럼 부(部)를 사용하기도 했다.

행정구역으로서의 부(部)는 고려 건국 초기부터 수도인 송악(개경, 개성)을 5부(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로 나누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성종 때 부(部)의 하위에 방(坊)과 리(里)를 두면서 ‘부-방-리’ 체계를 시행했다.

흔히 조선 시대로 떠올리는 한성오부의 행정구역 체계나 수도에 성저십리를 포함시키는 체계가 이미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던 것이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대한민국 국가지도집I」,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2014, 16쪽.
[2] 장학수, 「고려시대의 경기제 운영」, 경기문화재단, https://ggc.ggcf.kr/p/5b1b0e883a339208cbfd6158.
[3] 「고려말 화령부 호적관련 고문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