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주소 체계의 발전 ]
⑱ 고대 한반도의 주소 표기 – 삼국 시대와 통일신라
고구려는 3세기 후반부터 복속한 소국이나 읍락을 해체하고 지방통치구역인 성(城) 또는 곡(谷)으로 편제했고, 6세기 이후 ‘욕살(褥薩: 큰성) → 처려근지(處閭近支: 중형성) → 루초(婁肖: 작은 성)’의 3단계 행정체계를 확립했다.[1] 수도에는 5부를 설치했고, 수도인 평양 외에도 한성과 국내성에 3경(京)을 설치했는데, 지금의 직할시에 해당한다.
<그림1> 광개토대왕릉비(출처: Wikimedia Commns)
위의 사진은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인데, 비문에 “막0라성 가태라곡(莫0羅城 加太羅谷)의 남녀 3백명을 포로로 잡아왔다”라는 문구가 있어서 ‘성(城)’, ‘곡(谷)’이 실제 기능했던 행정단위임을 알 수 있다.
백제는 사비(현재의 부여)로 천도한 이후, 즉 6세기 중반부터 중앙집권적인 ‘5방(五方) → 군(郡) → 성(소성 또는 현縣)’ 제도를 실시했는데, 백제가 멸망한 660년에는 전국에 5부 37군 200성(또는 250현)이 있었으며 76만호가 있었다고 한다.
수도인 사비에는 5부(五部)를 두고 각 부를 다시 5항(五部)’으로 세분화하는 ‘부(部) → 항(部)’의 체제를 갖췄는데, 거리와 구획을 통해 주거지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구역’ 개념에 가까웠다.[2]
<그림2> 궁남지(宮南池) 출토 목간(출처: 국립부여박물관)
西部後巷巳達巳…
서부후항사달사…
이는 사비성의 ‘서부 후항’에 사는 사달사라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인데, 당시 백제의 행정 체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3]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확장된 영토에 대응하여 행정 체계를 계속 정비해 나갔는데, 신문왕 때인 685년에 9주를 완비했고, 757년에 이르러 경덕왕이 지명을 한자로 바꾸어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것은 단순히 한자 지명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당나라 식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강화하려는 시도였다.[4]
<그림3>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출처: 동아시아학 버츄얼뮤지엄)
當縣沙害漸村
당현사해점촌
이 ‘당현사해점촌’이 주소를 표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현(當縣)’은 ‘해당 현’이라는 뜻이며, 이 현에 있는 ‘사해점촌’을 말한다. 문서를 작성하면서 현(縣)의 명칭을 생략한 표현으로, 이 문서를 작성한 행정기관이 현(縣)이나 상위 행정기관인 군(郡) 혹은 주(州)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서는 촌락에 대한 기록이라서 호적(戶籍)보다는 촌적(村籍)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문서 작성 양식으로 보아 이미 작성된 호적과 인구 조사 장부를 토대로, 상부에 제출하기 위하여 다시 정리한 문서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동아시아의 역사」, 동북아역사재단,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성립과 전개”. http://contents.nahf.or.kr/item/level.do?levelId=edeah.d_0002_0030_0020_0020.
[2] “백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355 .
[3] 「宮南池 出土 百濟 木簡과 王都5部制」『韓國史硏究』92(1996). “국가유산 지식이음”에서 재인용.
[4] “9주5소경”,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09_0030_0040_0010
[5] 「新羅村落文書」, 가쿠슈인대 동양문화연구소 ‘동아시아학 버추얼 뮤지엄(東アジア学バーチャルミュージアム)’, https://www.gakushuin.ac.jp/univ/rioc/vm/c01_zenkindai/c0102_shiragi_list.html#
[6] 이 문서의 판독문은 「충북 아키비움」 사이트에 있다. (「신라촌락문서 판독문」, 충북실록, 충북아키비움, https://archive.chungbuk.re.kr/prog/prvncRcrd/view.do?rcrdNo=7&cntntNo=4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