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
서양식 센서스를 처음 시행한 로마 제국은 5년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이름, 출신지, 가문만으로도 개인을 식별할 수 있었기에 주소를 사용하지 않았다
⑧ 고대 로마의 주소
서양 세계의 주소는 어떠했을까? 고대 로마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도로망을 구축했다. 주요 간선도로만 29개, 포장도로의 길이는 약 8만km에 달했다.
주요 도로에 카시우스 도로, 라티나 도로 등의 이름을 붙였는데, ‘길의 여왕(Regina Viarum)’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아피아 가도(Via Appia)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주소는 없었다. 대신, 주요 도로들에 일정한 구간마다 ‘밀리아리움(miliarium)’이라는 돌기둥을 세우고 로마로부터의 거리를 적어 표지판으로 사용했는데, 이 밀리아리움을 이용해서 위치를 표시했다. (밀리아리움 사이의 거리는 1마일(mile)이었고, 이 단위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의 유적 중 하나인 퀀틸리 빌라는 ‘아피아 가도 5마일 표지석 근처(prope villam Quintiliorum ad miliarium V)’라고 위치를 표시했다.[1]
<그림1> 아피아 가도(Via Appia)와 퀀틸리 빌라
또한, 지형지물이나 유명인의 집 등을 랜드마크로 이용해서 위치를 식별하기도 했다. 광장 뒤, 분수대 옆, 누구 누구의 앞집 등과 같은 식이었다. ‘로마눔 광장과 율리아 바실리카 근처(Forum Romanum, prope Basilicam Juliam)’라고 하면 위치를 식별할 수 있었다.
고대 로마가 제국을 건설했음에도 주소가 없었다면, 중국과 같은 호적 조사는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고대 로마에서도 징세와 징병, 계급 구분을 위한 인구 조사를 5년마다 실시했다. 인구 조사를 뜻하는 센서스(Census)라는 용어 자체가 고대 로마에서 유래했다.
<그림2> 고대 로마의 센서스가 기록된 파피루스(The British Buseum 소장)
위의 사진은 고대 로마의 센서스 결과가 기록된 파피루스다. 그리스어로 적힌 이 파피루스는 이집트-수단 지역에서 발견되어 인구조사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림3>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제단에서의 인구 조사 장면(기원전 2세기 후반 , 마르티우스 캠퍼스 출토)
고대 로마에서의 인구 조사는 시민이 조사관 앞에서 양심에 따라 진술하겠다고 선서한 후, 조사관의 질문에 따라 자신의 이름과 가문, 출신지, 가족, 재산 등을 진술하면 조사관이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개인이 시민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것이 명예롭게 여겨지는 사회였고, 이렇게 이름과 가문, 출신지만으로도 개인을 식별할 수 있었으니, 굳이 주소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음 글에서 계속)
[1] Villa dei Quintili · Santa Maria Nova. Nuova edizione aggiornata della guida agli scavi, Ministero Della Cutura,
https://www.parcoarcheologicoappiaantica.it/in-evidenza/news/villa-dei-quintili-%c2%b7-santa-maria-nova-nuova-edizione-della-gu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