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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洞)의 어원과 유래②

[ 주소변경 이야기 ]

(洞)의 어원과 유래②

⒜ 유본예의 『한경지략』

동(衕)은 ‘가(街)’와 통한다. 지금 서울의 모든 거리를 ‘洞’이라 부르는데, 곧 중국의 ‘호동(衚衕)’과 같다. 중국에서 말하는 ‘洞’은 모두 바위굴에 속이 비어 있어 거처할 만한 곳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의 방리(坊里)¹까지도 또한 ‘洞’이라 하니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와전되었는지 알 수 없다. (중략) 우리나라에서 ‘洞’자를 사용하는 것은 모두 ‘동(衕)’이라 쓰는 것이 옳다.

먼저 <한경지략>에서 정의한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동(衕)은 ‘가(街)’와 통하고 중국의 호동(衚衕)과 같다”고 했다.

호동(중국말로 ‘후통’이다)은 골목을 뜻하는 몽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좁고 복잡한 골목길을 뜻하는 말이다. 널리 알려진 베이징의 유리창도 화려한 뒤쪽은 다 호동인데, 좁은 길 사이로 남루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금도 북경의 수많은 길들의 공식적인 명칭은 이런저런 호동(胡同)이다. 여기서 胡同은 衚衕의 간자체다. 원나라 때 베이징의 도시가 형성되면서 호동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으니 역사가 700여년을 헤아린다. 폐쇄적인 한글 ‘ㅁ’ 자 형태의 사합원()이라는 독특한 건축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이러한 집들이 큰 길과 연결되어 좁은 골목길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생긴 명칭이다. 북경에는 “이름을 가진 후통 삼천육백개가 있고, 이름 없는 후통이 소털처럼 많다” (有名胡同三千六, 無名胡同似牛毛)는 속담처럼 많은 후통이 존재한다.

이렇듯 <한경지략>에서는 ‘동’이 ‘가(街)’와 즉 ‘거리’와 통한다고 하고, 중국 베이징의 예를 들면서 ‘길거리 근처에 모여 사는 곳’을 ‘동’이라 하였다. 다시말해 19세기 한성의 골목길 주변으로 형성된 마을을 洞이라 하였고, 해서 산골을 의미하는 洞은 ‘거리’와 ‘골목길’을 뜻하는 동(衕)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다산 정약용의『아언각비(雅言覺非)』

洞은 공(空)이고, 洞은 빈굴(空穴)이다. 지금 풍속에서는 리(里)를 洞으로 하고 마을(里)을 동네(洞內)이라고 하며, (중략) 화양동(華陽洞)ㆍ백록동(白鹿洞)ㆍ소유동(小有洞)ㆍ구지동(仇池洞)등은 모두 산골 이름이다. 임금의 수레가 오가는 화려한 땅에는 원래부터 산골이 없으나 경성 5부는 리ㆍ항ㆍ호ㆍ동(里巷衚衕)을 모두 洞으로 부른다. (중략) 본래 산골이라는 뜻으로 洞이라는 이름을 쓰였는데, 이제는 산골이 없는 곳도 모두 洞이라 한다.

다산 정약용은 ‘洞’자에 대해 ‘산골’에서 유래했으나 “지금 풍속에서는 리(里)를 洞으로 하고 마을(里)을 동네(洞內라고 한다”라고 하면서 ‘里’가 ‘洞’으로 대체되었으며, 더 나아가 “산골이 없는 경성 5부의 리ㆍ항ㆍ호ㆍ동(里巷衚衕)을 모두 洞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洞’의 어원과 바뀐 쓰임새에 대해서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호동(衚衕)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로 ‘골목길’ 또는 ‘서민이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며, 여항(閭巷)이란 말과 동일하다. (여기서 항(巷)은 ‘거리’고 ‘여(閭)’자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선에서는 ‘여항’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흔히 중인을 비롯한 중간계급의 주거공간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중인계급은 물론이고 일반백성의 주거공간까지도 두루 포괄하는 말이다. 이 말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즉 도성에 있는 서민이나 중간계급의 주거공간이 곧 ‘여항’인 것이다. 양반 사대부의 주거공간과 구별되는 이 여항은 누추함, 시끄러움, 남루함, 가난함, 좁음, 밀집된, 저열함, 비천함 등으로 표상된다.” (이언진 시집 호동거실 평전 ‘저항과 아만’/2012년 박희병저)

결론적으로 지형적인 것에서 출발한 ‘洞’은 서울이 상업도시화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18세기 이후 “골목길의 상하좌우에, 골목길을 단위로 형성된 지역을 말해주는 것이다.” ‘洞’은 골목길 그 자체로, ‘중국의 후통(골목)이라고한 ‘한경지략’의 표현은 실태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성의 거리와 주민’, 요시다 미츠오/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 연구소 2019년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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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용비어천가는 우리말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작품으로 조선을 세우기까지의 위업을 중국 고사에 비유하여 그 공덕을 기리어 지은 노래다. (계명대학교 소유 목판본 사진임)

⒞ 후부지명소(後部地名素)²로서의 ‘洞’ 고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문헌에서 확인되는 ‘동(洞)’과 ‘곡(谷)’은 우리말로 모두 ‘골’이다.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바로 『용비어천가』다. 조선 세종 29년(1447)에 간행된 이 책에는 지명(地名)과 관련된 어휘들이 나온다. 한자 지명에 우리말인 훈민정음으로 주음이 달린 것이다. ‘洞’, ‘谷’, ‘골’의 지명소들도 다수 등장한다. 그 지명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加莫洞(가막동) 가막:골 9장 대동강의 근원 중의 하나로 희천군의 가막동이다.
北泉洞(북천동) 12장 송도(개성) 북부 오관방에 위치
加斤洞(가근동) 가‧큰‧동 14장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나루터
防墻洞(방미동) 33장 함경도 안변 영풍현 내에 있는 임진강의 발원지
韃靼洞(달단동) 다대:골 35장 함경도 홍원군의 달단동.
答相谷(답상곡) 답샹:골 35장 함흥부 동북쪽 15리에 위치
舍音洞(사음동) 35장 함흥부 동북쪽 25리 위치
蛇    洞(사    동) 45장 송동(개성) 동부에 위치
兎兒洞(토아동) 58장 함흥부 북쪽 125리에 위치
所磨洞(소마동) 설멧:골 78장 경기도 양주군 적성면 설마리에 위치
楸    洞(추    동) 100장 송도(개성) 중부 남계방의 한 고을

(참조문헌 : 2018년, 김양진 ‘『용비어천가』 소재 지명의 지리학’)

‘~골’이란 땅이름의 한자표기는 거의 동(洞)이고, 곡(谷)도 1개 보인다. 태종 이방원의 저택이 거주한 곳으로 알려진 송도(개성) 추동(楸洞)의 우리말 표기가 ‘가래올’로 되어 있어 ‘~올’도 ‘골’과 같은 마을의 지명소로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전국 지명 어디에서도 행정구역이 새로 편성되기 전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동, 리 명칭 중에도 이러한 동(洞)이나 곡(谷), 골 이름이 붙어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촌(村)과 리(里)는 모두 우리말로 ‘마을’이다. ‘마을’이라는 명칭은 ‘골’과 함께 우리나라의 동네 이름 중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 ‘~마을’이 곧 ‘~골’(일부 지방에서는 ‘실’이라고도 한다)이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서울(漢城)에서 한자로 표현할 때는 모두 ‘洞’이라 하였다. 지금도 우리는 리(里), 면(面), 읍(邑)이 도시화되면 ‘洞’으로 바뀌는 사례를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마을은 특정한 입지 조건을 가진 곳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며, 계획을 세우고 조성한 것 없이 정말로 자연스레 생긴 마을들을 특별히 ‘~마을’, ‘~동’, ‘~골’, ‘~실’이라 명명한 것이다.

또한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중기 이후 서울이 상업도시화가 진척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좁은 골목길이 형성되고 그 골목 주위로 거처하는 집이 들어서면서 정체성을 지닌 자치형태 공간인 洞이 형성되기도 했다.

행정구역이 들어서거나 행정관청, 다리(橋)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인공구조물을 참조하여 ‘洞’이 형성된 경우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울 중구의 <주자동(鑄字洞)>이다. 조선중기인 1621년(광해군13년)에 편찬된 ‘훈도방주자동지(薰陶坊鑄字洞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주자동의 유래를 밝히면서, 한성 중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청빈하고 의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남쪽 훈도방에는 주자국(鑄字局)이 있어 주자동이라는 동리의 이름을 붙였다. 동리는 남산을 자리처럼 깔고 있는데 반곡의 둘레가 채 1리가 되지 않고 또 지역이 외지고 길이 멀며 조정과 시장도 무척 떨어져 있어 명리를 쫓는 자들은 살지 않으려 했고 농단하여 이익을 꾀하는 자도 살지 않으려 했다.

오직 공역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 별다른 기능이 없는 자들이 서적을 인쇄하며 살았고, 사족 가운데 독서하며 요양하는 자들이 전망이 트이고 밝은 것을 좋아하며 살았다. 국초부터 지금까지 그래와서 다른 이름난 동리나 큰 마을에 비해 그곳은 또한 적막하고 무료하였다.

(중략) 부유해도 의를 잃지 않고 가난해도 도를 즐겨 서로 친애하고 서로 사랑하기가 시종일관 변함이 없어 비록 만석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 여기에 모여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후략)”

1. 방리(坊里)제도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으로 신라시대부터 서울(京)에는 ‘부(部)-방(坊)-리(里)’의 행정구역를 편재했으며 이 제도는 조선초기 까지도 유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2. 후부지명소(後部地名素)란 지리적 실체의 종류를 나타내는 지명형태소로 한자어권의 경우 지명어의 후부에 위치함. 예를 들어 설악산의 ‘산’, 금강의 ‘강’, 광주시의 ‘시’, 강원도의 ‘도’가 이에 해당함.(국토지리정보원 ‘한국지명용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