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변경 이야기 ]
동(洞)의 어원과 유래①
洞은 현재 우리나라 읍ㆍ면과 함께 최말단 행정구역으로 주민행정을 담당하는 기능을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洞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다. 洞이 하부의 행정단위로 구획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1910년 10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이름을 바꾸고 1914년 4월 1일부터는 조선시대의 “부/서-방-계-동-통-호(部/署-坊-契-洞-統-戶)”의 순으로 구분하던 행정구역을 폐지하였다. 조선시대의 ‘계-동(契-洞)’은 정식 행정구역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부락 또는 인적결합의 자치조직이라 할 수 있다. 대신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서울(경성부)을 186개의 동ㆍ정ㆍ통(洞ㆍ町ㆍ通)으로 하부의 행정단위를 구획하였다. 이 구역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洞’사무소(또는 주민센터)의 시발이 된 것이다.
예부터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있는 곳, 즉 ‘산과 산 사이에 움푹 패어 들어간 곳’이나 통행이 좋은 강나루 등(浦ㆍ津)에 부락이 형성되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인 바로 산(山), 곡(谷), 천(川), 계(溪/시내), 포(浦/개), 현(峴/고개), 암(巖), 곶(串), 평(坪), 벌(伐), 강(江), 해(海) 등의 지형을 고려하여 이들 자연부락에 지역공동체의 명칭을 주게 된다.
또한, 인간이 만든 인공 건축물인 행정관청, 사찰, 역참 등의 랜드마크 등도 참조하여 그 명칭을 정하기도 한다. 또한 존경받는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이 洞 명칭을 정할 때 활용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서에 洞이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고려사다. 고려시대의 洞은 행정적인 촌락이기 보다는 당시 일반민들이 행정형태의 리(里)나 촌(村) 등에 해당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붙여 관습적 또는 편의적으로 일컫는 경우가 더 보편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촌락 형태로 형성된 공간구분이다.
. ▶ (고려사, 충렬왕 5년) 죽판동(竹坂洞)의 민가(民家) 300여 호(戶)를 철거하고 거기에 새 궁궐을 짓는데, 일꾼들이 무려 4,000명이나 되었다.
. ▶ (고려사, 우왕12년) 왕이 곽사동(郭沙洞)에서 돌팔매놀이를 구경하였으며, 또 호곶(壺串)에서 사냥하였다.
조선시대의 洞 또한 자연부락 또는 자연촌락 형태의 마을 이름에서 출발된 것으로 판단된다. 서울 도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그 명칭이 보인다. 초기에는 백운동, 수성동, 무계동, 옥류동 등 산골로 경치가 수려한 곳의 지형적인 형태와 설치된 행정관청을 고려하여 마을을 洞이라 칭했지만 17세기 후반이후 서울(한성부)이 상업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거주하는 주민의 인구가 폭증, 사람이 사는 집들과 시장 거리의 가게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골목들이 빼곡하게 형성하면서 골목 좌우에 자연부락과 자치형태의 洞이 생겨나게 되었다. 거주민들이 洞의 명칭을 편의에 맞게 자유롭게 정한 것이다.
. ▶ (조선왕조실록, 태종 5년) 송충이가 종묘(宗廟) 북쪽 산과 백악(白岳)·인왕(仁王)·장의동(藏義洞)의 여러 산의 솔잎을 갉아먹으므로, 오부(五部)의 사람들을 보내어 잡게 하였다.
. ▶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 의주(義州)로부터 만포(滿浦)에 이르면서, 강(江) 연안의 여러 고을에 적(賊)이 침입하는 길로서 편하고 쉬운 곳을 물으니 벽동(碧潼)의 채가동(蔡家洞), 이산(理山)의 장동(長洞), 만포(滿浦)의 사을외동(斜乙外洞)은 모두 길이 평탄하여 들어갈 만하므로,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말하기를 가서 정벌하기가 쉽다고 하였습니다.
. ▶ (조선왕조실록, 정조12년) 삼각산(三角山) 밑 조계동(曹溪洞) 위에 푯말을 세웠다. 도성(都城)의 주맥(主脈)인데도 관민(官民)이 대부분 이곳에서 석재(石材)를 채취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洞’의 어원과 유래에 대해서 우리나라 각종 지리지등 문헌에서 본격으로 지역공동체의 이름으로 나타난 시기는 19세기 중엽 이후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정조시기 1830년에 편찬된 ⒜ 유본예의『한경지략』과 ⒝ 다산 정약용(1762~1836)의『여유당전서 ‘아언각비’권2』다. 두 책 모두 洞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쓰임에 대해서 설명했다.
왼쪽의 ‘한경지략’은 2020년 민속원아르케북스에서 발간한 (역자 박현욱) 책, 중간의 ‘여유당전서’ 사진은 중앙박물관 e뮤지엄, 우측의 ‘훈몽자회’는 국립한글박물관 사진자료임
⒜ 洞은 ‘가(街)’와 통한다. 지금 서울의 모든 거리를 ‘洞’이라 부르는데, 곧 중국의 ‘호동(衚衕)’ 과 같다. 중국에서 말하는 ‘洞’은 모두 바위굴에 속이 비어 있어 거처할 만한 곳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울의 방리(坊里)까지도 또한 ‘洞’이라 하니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와전되었는지 알 수 없다. (중략) 우리나라에서 ‘洞’자를 사용하는 것은 모두 ‘동(衕)’이라 쓰는 것이 옳다.
(『역주 한경지략』,2020년 ‘민속원아르케북스’간)
⒝ 洞은 공(空)이고, 洞은 빈굴(空穴)이다. 지금 풍속에서는 리(里)를 洞으로 하고 마을(里)을 동네(洞內이라고 하며, (중략) 화양동(華陽洞)ㆍ백록동(白鹿洞)ㆍ소유동(小有洞)ㆍ구지동(仇池洞)등은 모두 산골 이름이다. 임금의 수레가 오가는 화려한 땅에는 원래부터 산골이 없으나 경성 5부는 리ㆍ항ㆍ호ㆍ동(里巷衚衕)을 모두 洞으로 부른다. (중략) 본래 산골이라는 뜻으로 洞이라는 이름이 쓰였는데, 이제는 산골이 없는 곳도 모두 洞이라 한다.
(한국고전종합DB,『여유당전서 ‘아언각비 권2’』)
또 하나, 우리가 검토해야 할 문헌은 바로 <훈몽자회(訓蒙字會)>다. 조선전기 역관이자 학자인 최세진이 어린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하여 1527년(조선 중종)에 간행한 교재로, 실생활에 사용하는 3,360개 한자단어에 우리말인 한글로 뜻과 음을 달아 놓아 당시 우리말이 어떻게 쓰였는지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기역, 니은, 디귿…’이라 부르는 것도 이 책의 ‘언문자모’ 부분에서 처음 만들어 붙인 이름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훈몽자회’에는 ‘洞’ 또는 ‘골’, ‘마을’과 관계되는 글자가 다수 나온다. 위의 글 (a)와 (b)에서 언급된 ‘가(街)’, ‘항(巷), 리호동려(里衚衕閭)의 글자는 물론이고, ‘洞’과 관련된 ‘마을’(里, 村)과 ‘골(谷)’의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도 다수 보인다.
⒞『훈몽자회』에 실린 ‘골ㆍ마을ㆍ동’ 관련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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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그림은 1913년 조선광문회(최남선 편저)가 출간한 훈몽자회로 일본국립도서관 소장본이다>
훈몽자회 <지리(地理>편에 ‘동(洞)’, 곡(谷), 항(巷), 호(衚), 동(衕), 려(閭) 등이 실렸으며, <관아(官衙)> 편에는 리(里), 촌(村)이 편재되어 있다. 리(里), 촌(村)이 <관아>편에 실린 것은 아마도 말단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峒)자는 洞과 통한다고 하여 산골이라는 의미를 명확히 했다. 촌(村)자에 ‘ㄴ’이 없는 것은 오탈자로 보인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