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계, 혼돈과 질서의 만남 ]
제 2장 불확실성 길들이기 : 통계학의 발전
.1.3 통계와 통계기구
통계Statistics라는 용어는 국가를 의미하는 라틴어 Status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중엽 독일학자 고트프리드 아켄발Gottfried Achenwall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폰 빌펠트J. von Bielfeld는 1770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보편적 학식Elements of Universal Erudition’에서 통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1979년 제3판)에는 통계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무렵, 통계라는 말 대신에 “Publicistics”라는 단어도 함께 사용되었으나 이 단어는 곧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말쿠스C.A.V.Malchus는 1826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통계와 정치학Statistic und Staatskunde”에서 통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확장시켰습니다.
영국의 싱클레어John Sinclair 경은 1791-1799년에 간행된 일련의 저서에서 통계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저서의 제목은 “스코틀랜드에 대한 통계적 보고서: 스코틀랜드 주민들이 즐기는 행복의 양을 확인하기 위한 그 나라 상태에 대한 조사와 그 개선책”입니다. 그 당시 영국사람들은 싱클레어 경이 영어 대신 독일어인 “통계Statistics”와 “통계적Statistical”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18세기의 정치적 산술가들에게 통계는 치국의 과학이었습니다. 즉, 통계의 기능은 정부의 눈과 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수집한 원시자료는 대개 양이 너무 많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이를 적절히 요약하여 그 내용을 쉽게 해석하고 정책결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에서의 첫 시도가 런던의 상인 그란트 John Graunt(1620-1674)에 의한 사망명세표Bills of Mortality(사망자와 사망원인에 대한 목록)의 분석이었습니다.
(“The Table of Casualties”, from the 1676 edition of Graunt’s Natural and Political Observations… upon the Bills of Mortality. Photo © The Royal Society)
그는 사망명세표를 분석한 후 팸플릿을 만들었는데, 이 팸플릿에서 사망명세표의 내용을 몇 개의 명쾌한 테이블과 간결한 문장으로 요약하였습니다. 그는 이 분석을 통하여 여러 질병의 상대적인 사망률에 관한 문제들과 런던의 도시지역과 교외지역의 인구증가율에 관한 유용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는 생명표도 만들었는데 이 표는 인구 통계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란트는 통계학을 현재의 일상과 미래의 계획에 응용을 시도한 선구자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통계학을 일상에 응용한 사람은 벨기에 수학자 쿼틀레Adolphe Quetlet(1796-1874)입니다. 라플라스Laplace의 영향을 받은 쿼틀레는 확률을 공부했으며 통계학에서 흥미로운 분야를 개발하여 이를 일상에 응용하였습니다. 그는 사회분야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정상적 법칙에 따라 도수분포를 작성하였습니다.
또한 1844년에는 신장에 관한 정상분포를 이용하여 프랑스에서 징병기피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가를 발견해 보임으로써 통계학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징병소집에 응한 사람들의 신장에 관한 분포와 전체 인구의 신장에 관한 실제 분포를 비교하여, 약 2,000명이 신장을 작게 속여 징병을 기피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는 또한 과거의 경향을 분석하여 미래의 범죄를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통계학에 관한 연구를 증진하고 정책결정에의 이용을 증대하기 위하여, 그는 배비지Charles Babbage(1792-1871)로 하여금 런던통계학회를 설립하도록 하였습니다(1834). 그리고 나서, 그는 1851년 런던에서 ‘수정궁박람회 Crystal Palace Expositions’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국제적 협력을 얻기 위한 포럼이었으며, 3년 뒤 브뤼셀에서 열린 제1차 국제통계총회International Statistical Congress(1854)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초대 회장으로서 통계자료의 수집과 관련하여 일관된 절차와 일관된 용어 사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쿼틀레는 통계학을 사회를 개선하는 도구로 완성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GNP, 성장지수, 인구증가율 등과 같은 경제학 및 인구 통계학의 현대적 개념은 쿼틀레와 그의 제자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통계학이 ‘영국과학진흥협회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의 한 섹션으로 편입되고 1834년에 ‘왕립통계학회Royal Statistical Society’가 설립됨으로써 통계학은 비로소 과학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통계학은 다음과 같이 인식되었습니다.
19세기 초반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하여 세인들의 관심은 인간의 주위 환경과 관련된 문제들에 집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간 특히 1830-1850년경에 몇몇 국가에서 통계협회가 설립되었고 “사회의 환경과 번영을 설명하기 위한 사실들을 조사하고 정리하고 편찬하기 위하여” 수많은 국가에서 통계청이 설립되었습니다. [1800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중앙통계청Central Statistical Bureau이 세계에서 최초로 설립된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장에 필요한 요소들을 찾기 위하여 각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 가를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용한 분석적 연구를 위하여 각 국가로부터 비교 가능한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자료수집의 개념, 정의, 일관된 방법에 관한 합의가 필요하였고, 이는 정기적으로 국제회의를 개최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료들을 더 잘 비교할 수 있게 되고 더욱 신속하게 수집하게 됨으로써 모든 미래 관측치들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국제회의는 1853년에 브뤼셀에서 26개국 153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그 후 일련의 다른 회의들이 계속하여 개최되었는데, 각 회의에서는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공동의 방법으로, 공동의 정신 하에, 공동의 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각 정부와 국가들 사이의 합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통계학이 조사도구로서 유용하고도 발전된 학문이 되려면 국제협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853-1876년 유럽 각국에서는 경험을 교환하고 공통기준을 설정하기 위하여 수많은(약 10회) 통계 관련 국제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러한 국제회의들의 유용성이 판명되면서, 1885년 런던통계학회 5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각 국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준수하고 향후 국제 회의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기 위하여 국제통계학회International Statistical Society를 설립하자는 의견이 제안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토의 끝에 국제통계기구International Statistical Institute라는 명칭의 영구적 기구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ISI는 1885년 6월 24일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ISI는 2년에 한 번씩 회의를 개최할 것과, 회원자격, 협회지 발행 등에 관하여 규정하였습니다. 특히 강조한 것은 “통계보고서를 편집 요약하는 방법을 일원화하고, 정부로 하여금 문제해결시 통계학을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것”이었습니다. 1913년에는 ISI의 출판물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헤이그에 ISI 사무실이 영구 개설되었습니다.
ISI는 지난 100년 동안 그 활동영역을 상당히 넓혔습니다. ISI안에는 수리통계, 확률, 통계계산, 표본조사, 공식통계, 통계교육 등에 관한 별도의 학회가 구성돼 있습니다.